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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2018년 4월 15일)

현대로보틱스는 2017년 설립된 주식회사이다. 이름과 설립년도만 놓고 보면 무슨 로봇 만드는 스타트업일 것 같은 이 회사는 사실 2017년 기준 재계서열 9위인 현대중공업그룹의 지주회사이다. 인지도 제고를 위해서인지 지난 수요일(4월 11일) 현대중공업지주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어쩌다보니 이 회사의 주식을 조금 갖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현대중공업그룹 계열인 하이투자증권에서, 비대면계좌를 개설하고 300만원 상당의 거래를 하면 5만원을 준다고 하기에 딱 그만큼의 주식을 매수했었다. 부동산은 망해도 실물자산(땅이나 집같은)이 남지만, 주식은 망하면 휴지조각도 남지 않는다는 이유(요즘은 주권도 거의 발행하지 않는다)로 오랫동안 주식투자를 멀리 했는데, 그 무렵 가상화폐로 일확천금의 꿈을 이룬 사람들을 보고 상대적으로 안전한(?) 주식에 마음이 끌렸던 것 같다. 향후 25% 정도의 상승이 예상된다는 장밋빛 전망을 믿고 가즈아~!했는데, 석달 남짓 지난 지난 금요일 종가기준으로 5% 가량 손실을 보면서 존버하는 중이다.

이렇다할 노력 없이 쉽게 돈을 벌려 한다는 이유로 가상화폐에 빠진 이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 얼마 전 소위 삼성증권 사태 때 잘못 배당된 주식을 팔아치운 직원들에 대한 비난의 포인트도, 증권사 직원으로서의 도덕적 해이를 논외로 한다면  '노력 없이 거저 먹으려 한다'는게 컸을 것이다.

불로소득! 이름만 들어도 가슴 떨리는 이야기다. 가성비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시대에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소득이란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가.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근로소득은 자본소득을 이길 수 없다'는 명제는 2018년의 대한민국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봐도 '자본 시장의 과실을 누리려면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 시장에 참여를 해야 그 수혜를 누릴 수 있다. 대부분의 직업이 딱 경력과 업종 평균만큼 급여를 지급하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일한들 그 과실을 누린다?...불가능에 가깝다'는 LancyZ님의 트윗에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참에 소액이나마 자본 시장에 참여를 하지 않으면, 이 지긋지긋한 노동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허덕이게 될 것 같은 두려움에 빠듯한 형편이나마 투자를 시작했다. 누군가에게는 푼돈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정말 피같은 돈이었다. 그 놈의 묻어둔 돈이 뭐라고 틈틈이 주식 시세도 확인하고, 경제 기사도 살펴보며 현대로보틱스라는 기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개미의 안간힘을 무색하게 만들며 얼마전 혜성처럼 나타난 현대로보틱스의 3대 주주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정.기.선. 바로 현대중공업그룹의 오너 정몽준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증여받은 돈 3000억원에 대출받은 500억원을 더해 현대로보틱스 지분의 5.1%에 해당하는 83만 1천주를 매입했다고 한다. 보라! 스케일이 다르다 ㅋㅋㅋ  그는 배당을 받아도 나보다 10만배 넘게 받을 것이고, 시세차익을 보더라도 10만배 넘게 얻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나보다 10만배 넘게 유능하거나, 10만배 넘게 노력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성공은 대체로 정몽준과의 혈연관계에서 얻어진 것이다. '노력'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비트코인으로 얻은 성공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이렇다할 재미도 보지 못한 채 정몽준 -> 정기선 승계작업의 들러리만 된 것 같아 쓰린 가슴을 부여잡고, 새롭게 물색한 투자처가 대한항공이다. 나름 항공 분야 대장주라 할 수 있음에도 저평가되어 있다는 판단에 로보틱스와 똑같은 수량의 주식(하지만 주가가 낮아 매수금액은 15분의 1 정도)을 매수했다. 웬일로 이번 주식은 매수한지 2주도 안 돼 10% 이상의 수익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지난 목요일(4월 12일) 하루 사이에 7% 가까이 급락했다. 워낙 낮은 금액에 들어간지라 손실까지 보진 않았지만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침에 조현민 갑질 어쩌구 하는 기사를 읽을 때까지만 해도,  '과연 조용할 날 없는 패밀리답게 또 시작이구나' 정도 생각이었는데, 내 주식에까지 영향을 주다니 갑질의 해악이 피부로 느껴지는 듯 했다(물론 직접 겪으신 분들의 고통에야 비하겠느냐만은). 그리고 갑질의 배경, 즉 그녀가 가진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가 스스로의 능력과 노력이 아니라 조중훈이나 조양호와의 혈연관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때문에 더 씁쓸해졌다. 결국 광고대행사 직원은 조현민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못해서가 아니라 조현민 같은 집안에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봉변을 당한 것이다. 그래서 돈도 실력이니 가진 것 없는 너희 부모를 원망하라던 정유라의 말은, 유감스럽게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나 역시 평등을 믿지 않는다. 삼성의료원 특실에 누워 간신히 숨만 쉬고 있을 이건희와, 그의 수발을 드는 간병노동자가 어떻게 평등하단 말인가. 드높은 법대에 앉아 근엄하게 실형을 선고하는 판사와, 그의 한 마디에 법정구속되어 구치소로 끌려가는 피고인이 어떻게 평등할 수 있는가. 헌법을 열심히 공부했지만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는 헌법 제11조 제1항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한다는 헌법 전문도 공허한 말잔치일 뿐이었다. 조현아는 형사처벌까지 받았지만 집행유예 기간 중에도 경영에 복귀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고, 조현민에 대한 여론의 뭇매 역시 지나가는 해프닝일 뿐 그녀의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를 본질적으로 위협하진 못할 것이다. 국민정서가 미개해서 문제라던 정몽주니어(정기선의 동생) 또한 능력과 상관없이 현대중공업의 경영을 맡게 될 것이다. 버스요금이 70원이라던 정몽준이 한때나마 대권을 노리고 서울시장에 도전했듯이...

우리 법체계가 사유재산의 자유로운 사용 수익 처분을 보장하는 이상 부의 대물림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혈연으로 얻은 부와 지위를 자신의 능력이라고 착각하거나, 계약관계에 따른 대가로서 금전을 지불할 뿐이면서 갑의 위치에서 위세를 부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을에게도 나름의 능력이 있고, 자신의 노력을 통해 계약에 따른 의무를 이행한다는 점에서는 갑보다 못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갑의 지위가 혈연 등을 통해 얻은 불로소득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당신들보다 부족할지언정 온전히 내 노력으로 얻은 주식을 가진 주주로서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