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로 여자친구의 신곡 '밤(Time for the moon night)' 라이브 영상을 감상하는데, 인트로가 끝나자마자 군대에서나 들을 법한 우렁찬 구호가 울려퍼진다.
김소정! 정예린! 정은비! 최유나! 황은비! 김예원! 여!자!친!구! 밤하늘! 날아서! 여친을! 보러가! 응원은! 힘차게! 여!자!친!구!
비교적 성공한 걸그룹 축에 드는 여자친구이지만 이 정도 팬덤이 있는줄은 몰랐다. 하긴 어쩌다 음악중심이나 뮤직뱅크 보면 듣도 보도 못한 아이돌이나 걸그룹도 나름 열성팬들을 몰고 다니더라. 그래도 발표된지 1주일만에 응원법까지 마스터해서 따라 부른다는건 대단한 열정과 충성심이 아닐 수 없다.
이 땅에 아이돌과 걸그룹이 생겨나고 팬덤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기획사 시스템이 자리를 잡은지도 20여년이 넘었지만, 숱하게 명멸해가는 아이돌과 걸그룹 사이에서 자신들의 노래에 맞춰 응원을 해줄 수 있는 팬덤을 갖고 있다는 것도 축복이지 싶다.
따지고 보면 남진과 나훈아, 그 이후의 조용필도 소녀팬들을 몰고 다녔고 박남정과 소방차도 오빠부대는 있었지만, 자생적으로 나타난 개인 팬들이었지 조직적으로 응원을 할만한 팬클럽은 아니었다(조용필의 '비련'이란 노래 도입부 '기도하는' 부분에서 꺄악 소리를 지르는 걸 응원법의 원조로 볼 수 있을지도...?).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하며 비로소 음악산업의 가능성이 생겨나고 '아이비'라는 이름의 공식 팬클럽도 창단되었지만,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이 강했던 그들도 팬덤을 조직화하기 보다는 팬들과의 연대 및 소통('우리들만의 추억' 같은)을 더 중시했던 것 같다.
결국 응원다운 응원은 연예기획사의 체계적인 지원을 받으며 나타난 1세대 아이돌 H.O.T.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Club H.O.T.라는 이름의 H.O.T. 팬클럽은 한때 10만명(Club H.O.T. 5기 한 기수 기준. 당시 인터넷 가입이 아닌 우편으로 가입신청, 거기다 14세 이상이라는 나이제한까지 있었고 가입비가 15000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수치..라고 나무위키에 나와 있다)에 달하는 엄청난 회원수를 자랑한 것은 물론, 응원 도구로 흰색 풍선만 사용한다거나, 현수막, 플랜카드, 응원봉 등을 조직적으로 사용하는 등 팬클럽 응원문화에 새 지평을 열었다. 가사가 없는 전주 부분에 멤 버들의 이름을 외치거나 구호를 외치는 방식의 응원법(일본에서는 보통 'mix'라고 일컫는)도 이들이 최초다.
개인적으로 기억하는건, H.O.T. 2집 "행복" 간주 부분에 'Go! H.O.T.'의 '섹시가이 강타! (헤이 핸섬!) 위트가이 희준! (희준이는 삐까삐까) 무드가이 토니! (헤이 펑키!) 와일드가이 우혁! (막내 재원이는 샤이샤이가이가이)' 파트를 삽입했던 건데 이건 응원이라기 보다는 라이브라는 점을 과시하기 위한 퍼포먼스(?)에 가까웠던 것 같고. 그보다는 H.O.T.4집의 '환희'에서 전주 부분에 소위 고미사영 응원법이라 부르는 '에이쵸티! 에이쵸티! 고마워요 에이쵸티! 에이쵸티! 에이쵸티! 미안해요 에이쵸티! 에이쵸티! 에이쵸티! 사랑해요 에이쵸티! 에이쵸티! 에이쵸티! 영원해요 에이쵸티! 우리사랑 에이쵸티!' 가 들어갔던 부분이 최초의 응원다운 응원이 아니었나 싶다.
이후 신화의 '신화창조', god의 'fangod' 등이 나름의 응원법을 가지고 아이돌을 응원해 왔으나, 사실 그룹명이나 멤버 이름을 연호하는 것 이상의 응원법을 보여준 팬덤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 동방신기의 팬클럽 '카시오페아'였다. 이들은 데뷔곡 'HUG'에서부터 후덜덜한 응원법을 보여주는데...같이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하루만 니방의 침대가 되고싶어 (영!웅!재!중!)
더 따스히 포근히 내 품에 감싸 안고 재우고 싶어 (사랑해!)
아주 작은 뒤척임도 너의 조그만 속삭임에 (들어줘!)
난 꿈속의 괴물도 이겨내 버릴 텐데 (믹!키!유!천!)
내가 없는 너의 하룬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기억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난 너무나 궁금한데 (동!방!신!기!)
너의 작은 서랍 속의 일기장이 되고 싶어 (영원히!)
알 수 없는 너의 그 비밀도 내 맘속에 담아둘래 너 몰래 (시!아!준!수!)
(영웅재중! 최강창민! 유노윤호! 믹키유천! 사랑해요! 함께해요! 동!방!신!기!)
하루만 너의 고양이가 되고싶어 (최!강!창!민!)
니가 주는 맛있는 우유와 부드러운 니 품안에서 (기억해!)
움직이는 장난에도 너의 귀여운 입맞춤에 (유!노!윤!호!)
나도 몰래 질투를 느끼고 있었나 봐 (기!억!해!줘!)
내 마음이 이런 거야 너 밖엔 볼 수 없는 거지(동!방!신!기!)
누구를 봐도 어디 있어도 난 너만 바라보잖아(사!랑!해!요!)
단 하루만 아주 친한 너의 애인이 되고 싶어(함!께!해!요!)
너의 자랑도 때론 투정도 다 들을 수 있을 텐데 널 위해
In my heart in my soul
나에게 사랑이란 아직 어색하지만 uh uh babe
이 세상 모든걸 너에게 주고싶어 꿈에서라도
(동방신기 사랑해요 영원토록 함께해요)
내 마음이 이런 거야 지켜 볼 수만 있어도
너무 감사해 많이 행복해 나 조금은 부족해도 (기!억!해!요!)
언제까지 너의 곁에 연인으로 있고 싶어 (영원토록 사랑해!)
너를 내 품에 가득 안은 채 굳어버렸으면 싶어 영원히 (동방신기 사!랑!해!요!)
응원법의 짜임새만으로 Club H.O.T.보다 카시오페아가 더 열성적인 팬덤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 H.O.T. 시절에는 없거나 접하기 쉽지 않았던 휴대폰과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었다는 점이, 팬덤을 더 일사불란하게 조직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트랙마다 개인별 파트가 좀 더 정교하게 분절되었다는 점과 멤버들의 활동명이 4글자였다는 것 역시 해당 파트를 맡은 멤버의 이름을 연호하는 응원의 완성도를 높여준 요소가 아니었나 싶다.
상대적으로 여자 아이돌이나 걸그룹에 대한 응원은 보이그룹에 비해 빈약한 편이었는데 이는 걸그룹의 타깃이 되는 남성 팬덤이 쉽게 조직화되지 못했기 때문 아니었나 싶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좋아는 해도, 덕질은 쑥스러워하는 남자들의 소심함을 공략하는데 어려움을 겪던 걸그룹 응원법의 새 지평을 연 것은, 바로 소녀시대였다.
'태연 써니 제시카(제시카 탈퇴 이후에는 태연 써니 사랑해로 바뀌었다) 효연 유리 티파니 윤아 수영 서현짱'과 '지금은 소녀시대, 앞으로도 소녀시대, 영원히 소녀시대, 소녀시대 사랑해!'로 상징되는 그 의 응원법은 초창기 원더걸스에 비해 아쉬운 듯 했던 소녀시대의 인기를 정상으로 끌어올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의 팬덤은 굽네치킨을 치킨 프랜차이즈의 정상으로 끌어올렸으며, 발표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소녀시대의 데뷔곡 '다시 만난 세계'를 2016년 촛불집회의 테마곡 중 하나로 만드는 데에도 기여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아이돌/걸그룹 응원법의 선구적인 역할은 SM계열 그룹들이 맡아왔던 것 같다. (역시 SM 소속의 그룹인) 엑소나 레드벨벳에게도 그 나름의 응원이 있겠지만 그들의 공연영상을 접할 기회가 많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다. 팬덤으로는 빅뱅이나 방탄소년단, 워너원 같은 그룹도 만만치 않지만 응원법까지는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
걸그룹/여자아이돌보다는 보이그룹/남자아이돌에 대한 응원법이 잘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은 걸그룹 응원도 활발해 졌다(나무위키에 응원법으로 분류된 하위문서 15개 중 보이그룹은 5개 뿐이고 10개는 걸그룹에 대한 것이다). 덕분에 각종 음악 프로그램이나 유튜브에 직캠으로 도는 공연 영상을 보면 우정의 무대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때도 있다. 그 형태는 전주/간주 파트에선 멤버들의 이름을 연호하면서(이 경우 멤버는 보통 나이 순으로 호명하며, 예명보다 본명을 부르는 경우가 많다), 해당 아이돌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거나, 부각시키고 싶은 그룹/멤버의 특징/캐릭터를 외치는 것들이 대부분이며(대개 그룹/아이돌별로 일정한 구호를 곡에 맞춰 조금씩 변형시켜 사용한다. 가령 트와이스는 '원인어밀리언', 여자친구는 '응원은 힘차게'를 애용하는 편이다), 보컬 파트에선 가사의 특정 부분을 가수와 주고 받거나 함께 외치면서 노래를 완성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내게 힘이 돼 주었던
나를 언제나 믿어주던 그대
다들 그만해
라고 말할 때
마지막 니가
바라볼
사랑 이젠 내가 돼줄게
아~
- 에이핑크, 'No No No' 중에서
여전히 오늘도 화창했었지
자꾸만 하루 종일 네 생각만
친절한 너에게 전하고 싶어 내 맘을
구름에 실어 말하고 말 거야
- 여자친구, '귀를 기울이면' 중에서
위에서 보는 것처럼 일종의 세로드립인 굵은 글자를 팬들이 외쳐줌으로써 아이돌의 무대에 함께하는 것이다. 또는 가사에서 리듬감을 주고 싶은 음절이나 어절을 따라하면서 곡의 음악적 완성도를 높이기도 한다. 말이 팬이지 이 정도면 또 하나의 멤버 아닐까.
덕질에도 레벨이 있다면 아이돌 덕질의 만렙은 팬클럽의 일원으로 공연장에서 응원법에 참여해 떼창을 시전하는 게 아닐까 싶다. 진정한 팬이라면 그대여, 부끄러워 말고 함께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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