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제는 지나가버린 옛날의 추억이지만, 2016년 제20대 총선의 최대 승자는 안철수 대표가 이끄는 국민의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1당이 된 건 더불어민주당이었고, 정당투표에서 1위를 한 건 새누리당이었지만, 정당투표에서 민주당에 앞서는 2위를 차지하고,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통틀어 총 38석으로 당당 제3당이 되어 캐스팅보트를 행사하게 된 건 누가 뭐래도 엄청난 성과였기 때문이다.
현행 헌법이 시행된 1988년 이래 여당과 제1야당이 아닌 독자노선으로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를 만든건 3김씨와 정주영 뿐이었다. 아울러 1인 2표제가 도입된 2004년 이래 여당과 제1야당을 제외하고 20% 이상을 얻은 정당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 어려운 일을 안철수가 해낸 것이다.
비록 호남과 비례대표를 제외하면 안철수와 김성식, 두 사람밖에 당선되지 못했지만, 호남의 쟁쟁한 거물들인 정동영 천정배 박지원 박주선 등을 하나의 간판으로 모아 호남 28석 중 23석을 석권한 것 또한 비 민주당계 정당으로선 최초의 일이었다.
여기까지가 안철수의 전성기. 2016년 총선에서 26.74%이었던 국민의당 지지도는 2017년 대통령선거에선 21.41%로 낮아지더니, 바른정당과의 합당으로 바른미래당이 된 후 2018년 지방선거에선 7.81%(서울시장선거에 나선 안철수는 19.55%)까지 떨어졌다가, AGAIN 국민의당이 된 이번 총선에선 6.79%까지 떨어졌다. 그리하여 국민의당이 얻은 의석수는 달랑 3석.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어쩌다가 4년 사이에 지지도는 1/4, 의석수는 1/10로 줄어들었단 말인가.
2.
이번 총선을 앞두고 며칠동안 지상파 저녁시간 메인뉴스의 정치 관련 리포트를 유심히 보았다. 방송사를 막론하고 대개 비슷한 패턴이었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선대위원장은 뫄뫄...미래통합당 황교안 대표는 블라블라...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은 어쩌구저쩌구...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이러쿵저러쿵..."
그렇게 3분 가량 리포트를 진행한 후 맨 마지막에 '한편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는...' 이러고 딱 한 문장 나오더라.
대개의 경우 안철수가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이거나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나온 대화 같은데, 달랑 한 문장인데도 불구하고 메시지는 귀에 들어오지 않고 마라톤하는 화면만 인상적으로 잡히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지인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총선 뉴스는 '기승전안철수'다. '한편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는 오늘도 달리고 있습니다. OOO뉴스 XXX입니다.'로 끝난다"라고 했더니 다들 뒤집어졌다.
한마디로 메시지 전달에 실패한 것이다.
3.
이번 총선에서 국민의당은 지역구 후보를 내지 않았다. 명분은 문재인 정부의 실정에 맞서 지역구에서 여당과 야당의 1대1 대결구도가 필요하다는 것. 결과적으로 미래통합당에 힘을 실어준 셈이니 일종의 야권 단일화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후보를 안 낸 게 아니고 못 낸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협소한 인재풀, 합당과 분당을 거치며 와해된 지역 조직, 낮은 당선가능성 등. 거기에 지역구 도전을 준비하던 소위 '안철수계' 인사들이 대부분 미래통합당으로 빠져나가며 현역 의원도 지역구에 출마할만한 인사도 얼마 안 남게 되었다. 지역구 포기는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던 셈.
이에 대해 안철수는 "개인적 선택과 결정을 존중한다"며 "어떤 길을 가든 응원하고 다시 개혁의 큰 길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대인배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치명적인 선택이었다고 본다. 2012년 대선 출마 후부터 안철수 곁에 있던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안철수를 한참 이용하다가 뒤통수를 치거나 나몰라라 하기 일쑤였는데, 그에 대해 사실상 꽃길을 깔아준 셈.
제대로 된 정치지도자라면 앞에서는 "그 분들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건 다 나의 부족함 때문이다. 너무나 안타깝고 고통스럽다"라며 지지자들을 결집시키고, 뒤에서는 자객공천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확실하게 응징했어야 한다. 아울러, 설령 당선가능성이 0에 수렴하더라도 희망하는 사람은 최대한 지역구에 공천해서 각 지역에 안철수의 조직을 만들었어야 했다. 심지어 허경영의 국가혁명배당금당조차도 웬만한 지역구에 다 공천을 해서 정당 인지도를 제고시켰는데, 지역구를 포기했으니 딱히 선거운동할 방법이 없어 대표는 달리기밖에 못하고, 30개도 넘는 정당 중에 기호 10번, 위에서부터 8번째 칸이 안철수당이라는 걸 알리기도 버거웠던 것이다.
지역구 비중이 절대적인 한국의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지역은 절대로 철수해선 안 되는 '안 철수' 아이템이라고 봐야 한다.
4.
개인적으로 2016년 총선에서 국민의당에 대해 주목했던 것은 38석의 의석이나 26.74%의 정당득표보다는 지역구에서 얻은 14.85%의 득표율이었다. 전국 지역구 253개 중 173개만 공천했기 때문에 국민의당 후보가 출마한 지역구만 따지면 실질적으로는 평균 20%를 상회하는 득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창당 후 72일이라는 촉박한 시간동안, 호남을 제외하고는 거의 당선가능성 없고 인지도 낮은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수준의 후보들을 데리고, 단일화압박 및 사표방지심리와 싸워가며 얻은 득표수가 이 정도였다.
무엇보다 15%를 득표하게 되면 선거비용을 전액 환급받게 된다. 즉 후보자 개인의 경제적인 부담 없이 다음 선거를 준비하고 지역 당 조직을 마련할 수 있는 종잣돈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좀 단순무식하게 계산해서 국민의당 지역구 후보들이 2016년에 15%씩 득표했다 치고, 이후 각 지역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선거때마다 꾸준히 5%씩만 지지도를 높여갔다면 2017년 대선에선 20%, 2018년 지방선거에선 25%, 그리고 이번 총선에선 30% 그 이상의 득표를 하지말란 법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안철수는 2016년에 무엇을 해야 했던가? 총선 후 소위 '리베이트 사건'의 여파로 당 대표에서 물러났던 그였지만 당내 영향력 만큼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예컨대 '조직위원장' 같은 직책을 갖고 전국의 당 조직을 돌아다니며, 지역의 현안도 확인하고 시도지사나 시장군수도 만나며 보폭을 넓혔으면 어땠을까. 가령 2016년말의 촛불집회도 서울이 아니라 매주 다른 지역에서 참가했다면 주목도 받고 현지의 당원들을 격려하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5.
2017년 대선 초반 기세를 올렸던 안철수는, '갑철수'와 'MB아바타'로 대표되는 TV토론을 계기로 급격히 추락하며 끝내 3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단 한 명만 당선되는 대통령선거에서 2위든 3위든 떨어지는 건 똑같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선거 만큼은 그렇지 않았는데 문재인 집권 이후 어느 당이 더불어민주당에 맞설 대표야당이 되느냐가 걸려 있던 선거였기 때문이다.
안철수가 3% 포인트만 더 얻어 2위를 했더라면, 가뜩이나 박근혜 탄핵 후유증으로 위기에 처했던 자유한국당은 소멸의 길을 걸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적어도 영남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선, 국민의당이 더불어민주당에 맞설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다.
이 경우 자유한국당은 물론이고, 개판 치면서도 적폐세력에게 정권을 넘길 수는 없지 않느냐는 이유로 거저 먹는 정치를 해왔던 더불어민주당 또한 기로에 놓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였을까? 대선기간 더불어민주당의 네거티브 공세는 홍준표와 자유한국당보다는 안철수와 국민의당에게 집중되었고, 막판에는 호남권을 중심으로 '홍준표가 당선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조성시켜 안철수를 견제하고 문재인으로의 표쏠림을 유도하기까지 했다.
'어차피 너 아니면 나' '그래도 쟤들보다는 우리가 좀 낫죠? 식의 과점형 양당체제에서 땅짚고 헤엄치기 식 정치를 해왔던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에게는,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는 상대방보다 이 구조를 깨려고 드는 제3세력이 더 위협적이었던 것이다.
지나고 보니 더 아쉬운 일이긴 하지만, 자유한국당이 소멸하고 국민의당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면 한국정치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으리라 본다.
6.
대선 이후 안철수는 국민의당 대표를 맡아 바른정당과의 통합을 주도했지만, 이후 출범한 바른미래당에서는 서울시장 낙선 후 별반 활동을 하지 않고 독일로 떠나버렸다.
이는 결과적으로 무책임한 행보가 되어버렸는데, 패스트트랙과 총선 준비 과정에서 국민의당 계열과 바른정당 계열의 내분으로 인해 20석 넘는 원내 제3당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식물정당 상태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안철수는 무엇을 해야 했던가?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가령 '바른정치아카데미' 같은 걸 세워 원장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인재를 키워낼 생각보다 선거철에 공천을 미끼로 외부의 인사들을 영입하는데 급급한 우리 정치권의 실정에 비추어볼 때, 의미있는 시도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청년 정치지망생들을 대상으로 6개월 내지 1년 정도의 소수 정예 합숙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그렇게 길러낸 인재들에게 지방의원에 출마하거나 보좌관, 당직자 등으로 진출할 기회를 줬다면 당의 화학적 결합은 물론, 인재풀도 굉장히 넓어졌을 것이다.
7.
2012년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하기 이전의 안철수는 요즘으로 치면 이국종과 백종원을 합쳐 놓은 정도의 위상을 지닌 거물이었다.
정계 입문 후에도 대략 2017년 대선 및 2018년 지방선거 무렵까지의 안철수는 차기를 노릴 수 있는 유력한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안철수는 3석을 지닌 군소정당의 원외 대표에 불과하며, 기존 한국 정치의 통념이나 상식에 비추어봤을 때에는 독자적으로는 대선에 도전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나마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이 있다면 인물난에 허덕이는 미래통합당에 합류하여, '리뉴얼된 보수'의 간판으로 대선에 도전하는 방법 뿐인데, 예전처럼 나이브한 모습으로 들어갔다간 또 그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버려질 가능성이 높다.
전도유망했던 정치인이 몇번의 선택으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잃고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사례는 이회창, 이인제, 손학규, 정동영, 오세훈 등 한 두명이 아니었지만, 안철수 역시 본의 아니게 철수를 반복하다가 예전의 정치적 입지를 잃어버린 셈이다.
그럼에도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영광과 실패를 굳이 복기해 보는 것은, 1990년 3당합당 이후 늘 대표되지 못하고 외면받기 일쑤였던 20% 이상 중도 성향 국민들을 대변할만한 정치인은 그래도 안철수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낮아진 정치적 위상에 힘들 수 있겠지만 실망하지 말고 이번만큼은 철수도 하지 말고,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현장으로 들어가 국민과 함께하는 진정성 있는 행보를 보이다 보면 뜻밖의 기회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선거 끝나고 나서도 누가 주목하거나 말거나 다시 대구로 내려가 의료봉사활동에 나선 모습은 높이 평가할만 하다. 적지않은 상처를 입었지만 그래도 안철수는 한국 정치에서 매력적인 브랜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