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과 더불어시민당, 여당이 '더불어' 이겼다. 그것도 헌정사상 보기 드물 정도로 원사이드하게 압승을 거뒀다. 300석 중 180석. 계산하기도 쉽지만,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시킬 수도 있는 60%다. 이 정도의 의석을 가져간 것은 4.19 직후였던 5대 총선의 민주당, 3.15에 맞먹는 부정선거였던 7대 총선의 민주공화당, 그것도 모자라 아예 전체 의석수의 1/3을 대통령이 지명하다시피했던 9대와 10대의 공화당+유정회 말고는 없었다. 오직 1등만이 살아남는 소선거구제 하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영원히 메울 수 없을 것만 같던 호남과 영남의 의석수 차이조차도 가볍게 무너뜨려버린 압도적인 결과였다.
조짐은 있었다. 선거 2~3일 전 더불어민주당 지역구만으로 155석 이상 확보가 가능하다는 찌라시가 돌았고, 박형준도 미래통합당의 개헌저지선(101석)이 위험하다고 대놓고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1990년 3당합당 이후 현재까지 한국 정치의 보편적인 상식에서 호남기반 '민주당'이 얻을 수 있는 최대치의 의석은 노무현 탄핵역풍이 불었던 2004년 17대 총선의 152석 정도, 한나라 새누리 자유한국 미래통합당으로 이어지는 영남기반 정당이 얻어야 하는 최소한의 의석은 2004년에 얻은 121석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바로 직전 20대 총선에서도 새누리당은 '폭망해서' 122석을 얻었고, 1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이 얻은 123석과 호남 지역구 25석을 더하면 148석이 되므로, 이번 총선의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거기에 2017년 대선 이후 누적되어온 정권에 대한 피로감, 조국 사태 등에서 보여준 내로남불 식의 행태,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시키는 4+1 협의체의 무리한 패스트트랙 처리, 초기 코로나 대응에서의 아쉬운 모습들이 결합됨에 따라 이번 선거는 야당에게 유리한 상황이 될거라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소위 보수통합으로 과거 바른미래당계 비호남 인사들을 대거 영입 또는 복귀시킴에 따라 영호남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 지역구에서 1:1 대결구도가 만들어진 것도 야당에는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 모든 유리한 요소들을 깡그리 날려 버리고 비영남 대부분의 지역구를 더불어민주당에 헌납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미래통합당 측의 자멸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김형오 황교안 콤비가 말아먹은 막장공천은 불후의 졸작이 아닐 수 없었다.
1. 현역 의원을 물갈이하면서 다른 곳에 돌려막기하는 재활용 공천, 압권은 원래 지역구(경북 상주군위의성청송)에서 컷오프 당하고 서울 중랑을에 공천신청했다가 경선 패배로 본선엔 나가보지도 못한 채 의문의 2연패를 당한 김재원.
2. 바른미래당 출신 이찬열 임재훈을 공천 줄 것처럼 영입하고는 패스트트랙 가담자라며 탈락시킨 뒤통수 공천, 그 밖에도 수도권 험지에 공천된 바른미래당 안철수계 출신들은 전원 낙선의 대기록을 세움.
3. 황교안의 성균관대, 검찰 후배인 윤갑근을 꽂아주기 위해 4선의 중진 정우택을 옆 지역구로 보내버린 밀어내기 공천, 물론 둘 다 떨어짐. 이로써 자유한국당 역대 원내대표(정우택 - 나경원 - 심재철)들도 전원 낙선의 대기록을 세움.
4. 더 설명이 필요없는 미래한국당의 비례대표 공천
5. 부산 북강서을에 전진당 출신 김원성 공천했다가 미투니 호남비하니 하면서 취소하고 불출마선언했던 김도읍을 공천. 그런데 명색이 당 최고위원이었던 김원성이 무소속 출마까지 했는데, 정작 해당 논란에 대해서는 당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아서 그냥 황교안 비서실장 출신 김도읍을 공천하기 위한 공작으로 의심받는 것은 물론 전진당과 통합한 의미도 퇴색됨.
6. 세월호 막말 전력이 있는 차명진을 공천하면서 생길 수 있는 논란을 철저히 검증하지 않은 대충 공천, 이후 쓰리썸 막말 파문으로 차명진을 제명하네 마네 법석을 떨었지만 법원 가처분 결정에 따라 통합당 간판으로 끝까지 완주하는데 성공하면서 수도권 부동표를 다 날려먹는데 큰 공을 세움.
7. 홍준표의 양산 출마를 받아줄 것처럼 하고는 나동연을 내세워 뒤통수를 쳐버림. 결국 홍준표는 대구에 출마하면서 통합당의 TK싹쓸이를 저지했고, 양산의 나동연은 김두관에게 패배하며 -2석의 효과.
8. 강릉에서 권성동 컷오프 시키면서 중학교 졸업하자마자 강릉을 떠나 실정도 모르는 홍윤식 공천하는 바람에 낙선은 둘째치고 선거비용 보전도 못 받는 참패를 당함.
9. 민경욱 민현주를 몇번이나 뒤집었던 인천 연수을의 부침개 공천, 결국 여당표가 민주당과 정의당으로 갈라졌는데도 패하고 말았다. 민경욱은 분한 나머지 사전투표의 부정 의혹을 제기하고 있지만 여론은 황교안이 장악한 미래통합당 최고위원회하고는 다른지라...반면 같은 인천에서 컷오프된 윤상현은 민주당은 물론, 통합당에서 공천받은 인천시장 출신 현역의원 안상수도 제치고 유유히 당선됨.
10. 현역의원 이주영을 쫓아내고 공천된 최형두는 김형오 의장 시절 국회 대변인 출신, 현역의원 안상수를 쫓아내고 공천된 배준영은 김형오 의장 시절 국회 부대변인 출신...참고로 이부망천, 인천 촌구석으로 초토화된 인천에서 유일하게 통합당을 뽑아준 곳이 거기임. 과연 배준영의 개인기 덕분이었을까?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되는 곳이었을까?
야 진짜 쓰다보니까 가관이네. 김종인은 커녕 박근혜가 왔어도 이길 수가 없는 선거였다. 이러고도 이겼으면 정말 선거의 신이었겠지만 황교안은 그럴 깜냥마저 못 되었으니...N번방이나 투표용지 관련 실언들을 비롯 황교안이 까먹은 표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민주당이 마음에 안 들던 사람들마저도 미래통합당에게 표를 주기는 여전히 부담스럽다. 미래통합당에게는 시련이 더 필요하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말았다.
결국 전국 단위 선거에서 '통합'이라는 당명을 쓰는 정당들의 잔혹사는 이번에도 되풀이되었다. 15대 총선의 통합민주당(a.k.a. 꼬마민주당), 17대 대선의 대통합민주신당, 18대 총선의 통합민주당, 19대 총선의 민주통합당까지...그동안 민주당계 정당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통합'(그러다 보니 추호 김종인 선생마저 자꾸 미래통합당을 민주통합당이라고 부르는 실수를)이라는 단어를 간만에 한나라당에서 가져갔다가 그만 배패의 징크스까지 가져온 셈이다. 뭉뚱그려 얘기하기에 조심스러운 측면은 있지만 화학적 결합 없이 그냥 선거를 앞두고 이합집산하던 여러 세력의 '닥치고 통합' '묻지마 통합'이 실제 선거에서는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결과론적인 얘기일지 모르나 앞선 통합이나 이번의 통합 모두 국민들이 보기에는 원래 한 집단이던 그 나물에 그 밥들이 치열한 당권투쟁, 공천권 싸움 끝에 다시 모여든 것처럼 보이는 걸 딱히 부인할 수 없어서 감동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 당명에 조차 함께 지향하는 가치를 의미하는 단어를 넣지 못하고 통합으로 떼워버렸는데, 그마저 '미래통합당'이라니 지금도 아니고 미래에나 통합하겠다는 뜻으로 읽히기까지 하는 것이다.
물론 여당의 압승에는 코로나19로 인한 영향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나라나 이 정도의 위기를 겪으면 정부를 중심으로 단결하자는 여론이 생기게 마련이고 자연스레 정권 지지도도 올라가는 경향이 있지만, 초반 버벅거리는듯 하던 정부의 대응이 정은경 본부장을 중심으로 점점 안정되어 가며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던 미국 일본 유럽 국가들보다도 나은 모습을 보여주기에 이르자 문재인 정부의 지지도 또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호나 메르스 때 보여준 박근혜 정부의 졸렬한 대응과 대비되어 더욱 괜찮아 보였던 점도 있고. 막판에 재난지원금을 풀기로 한 것 또한 (그 정책의 적절성 여부는 논외로 하고) 선거의 관점에서는 절묘한 한 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새로 얻은 의석보다 잃어버린 용산, 강남, 송파의 3석과 부산 대구의 2석씩을 더 아프게 느껴야한다고 보는데, 대구의 지역감정은 2017년 대선, 2018년 지선에서도 반복된 부분이라 그렇다 해도 부산의 김영춘 김해영 같은 괜찮은 인재들이 근소한 차이로 낙선한 것은 정말 아쉬운 부분이다. 전체적인 득표율이 오른 점을 감안하면, 2016년 대부분 지역구에서 제3세력으로 의미있는 득표를 올렸던 '국민의당'이 사라지며 지역감정이 더 심화된 듯 하다.
용산과 강남, 송파의 경우에도 종부세와 재건축 같은 예민한 이슈들이 있어 쉽지 않은 측면이 있었으나 보수성향이 강한 용산에는 조금 더 안정감이 강한 인사를 공천하고, 언론 주목도가 높았던 강남갑(태구민 vs 김성곤)이나 송파을(배현진 vs 최재성)보다는 상대방 후보가 낙하산이었던 강남을(박진 vs 전현희)과 송파갑(김웅 vs 조재희)에 집중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실제로 강남갑보다 강남을, 송파을보다 송파갑이 표 차이가 더 적게 나기도 했고. 송파을의 경우 최명길 최재성이 연이어 당선되면서 민주당에 유리한 지역이라는 인상이 있지만 20대 총선에서는 공천파동의 영향으로 새누리당 후보가 나오지 않고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점, 이후 2018년 재보선 때까지 자유한국당 조직이 거의 붕괴된 상태에서 그나마 야권표를 바른미래당 박종진 후보가 나눠갔던 점 등을 감안하면 다소간 착시효과가 있었던 걸 부인할 수 없다. 선거막판 송파을에 속하는 신천에서 송파갑을병 합동 지원유세를 하며 기세를 올렸던 이낙연이 차라리 송파구 구석구석 돌며 호남 표를 모아왔더라면 호남 출신 김웅 vs 영남 출신 조재희의 대결구도에서 조금은 조재희에게 유리한 국면이 형성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선거가 과학적이 되어가며 여당과 야당의 브레인들이 보는 판세분석도 더욱 정교해져 가는 것 같기는 하다. 앞서 통합당 박형준의 개헌저지선 드립이나, 민주당 이근형의 지역구 163석 예측 및 더불어시민당의 비례대표 17석 목표, 그리고 선거막판 판세를 흔든 끝에 결국 자성예언이 된 유시민의 '180석' 발언까지 신통방통하게 맞아 버렸다.
물론 선거를 앞두고 각 당 인사들이 내는 소리는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가 들어 있긴 하지만, 그 가운데 제대로 영향을 끼친 건 평론가를 가장한(?) 플레이어 유시민의 180석 발언 정도? 여기에 배패를 예감한 미통당의 읍소 전략이 결합되며 양쪽 지지층이 결집하는 효과가 나타나긴 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여론조사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열린민주당이 유탄을 맞고 비례대표 3석으로 주저앉았으니 유시민 180 발언의 최대 피해자는 흑석 김의겸(열린민주당 비례 4번) 선생이었을지도. 지역구에서는 인천 연수을(통합당 민경욱 지역구)과 경기 고양갑(정의당 심상정 지역구)에서 사표방지심리가 나타나며 민경욱 낙선(정의당 이정미 표가 민주당 정일영에게 이동), 심상정 당선(민주당 문명순 표가 심상정에게 이동)의 결과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 몇년간의 선거에선 사전투표, 재외국민투표 등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들이 엿보이는데, 특히 이번 선거에선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인해 여러가지 어려움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도 자가격리자들까지 투표를 시키면서 이렇다할 집단감염 사례가 나오지 않은 것은 정말 높게 평가할 부분 같고, 왜곡된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인해 군소정당들이 난립하며 개표를 수작업으로 해야 하는 상황이 왔음에도 큰 잡음없이 늦지 않게 선거결과가 나온 점도 칭찬해 주고 싶다.
다만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대적 화두가 된 이 시국에 굳이 다같이 투표소에 모여서 투표를 할 게 아니라, 희망하는 사람들만이라도 본인인증하고 모바일이나 인터넷으로 투표하면 안될까 하는 근원적인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이미 우리는 투표보다 더 무겁게 여기는 수백 수천만원 단위의 금전거래도 그런 방식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해킹이나 결과 조작에 대한 의구심과 관련해서는 그게 못미더워 현장 투표를 고집하는 지금도 사전투표가 조작되었네, 수개표를 해야 되네 하는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결국 기술에 대한 신뢰도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라는 것. 그런 의미에서 민주당이 안정적인 의석을 장악한 21대 국회에서는 전자투표 도입이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