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믿기 어렵겠지만 우리나라의 복지예산은 적지 않은 편이다. 2020년 정부예산이 대략 512조 3천억 원 가량인데, 그 중 보건, 복지, 고용 관련 예산이 180조 5천억 원이나 되기 때문이다.
물론 돈이란 다다익선인 만큼 예산이 더 늘어나면 할 수 있는 일도 더 많아지겠지만, 국민들의 조세저항이나 다른 분야(특히 남북 대치 상황에서의 국방비)와의 형평성 등을 감안했을 때, 이 정도면 비율(35.2%)로 보나 총액으로 보나(GDP 기준으로도 10%가 넘는다!) 절대 적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국민 1인당 360만원에 달하는 이 적지 않은 금액을 지출하는데도 국민들이 느끼는 복지 수준은 형편없는 것만 같다. 대부분 국민들이 내는 세금에 비해 혜택을 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오죽하면 '나라에 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도둑놈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라는 허경영의 포퓰리즘 선동마저 공감을 얻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이러한 불신은 '눈먼 돈'에 빨대를 꼽아 인마이포켓하는 최근 일련의 도덕적 해이 현상과 맞물려 심화되었고, 증세를 수반하는 복지에 대한 거부감으로도 표현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보편적 복지는 부유한 사람들에게까지 혜택을 주어야 하느냐는 논쟁으로, 선별적 복지는 홍보부족과 복잡한 신청절차, 불분명한 기준 등으로 인해 엉뚱한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거나 복지사각지대가 발생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있다.
이와 관련해 10년전쯤 현 청와대 사회수석비서관인 김연명 교수의 특강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전달체계가 왜곡되고 지나치게 많은 비용이 발생하게 될 경우 복지를 통해 소득불균형이 더 심해진다, 남미 여러 나라의 복지 시스템이 붕괴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취지였던 것 같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으로 제시된 것이 기본소득, 쉽게 말해 복지예산을 누구에게 어떻게 쓸지 고민하기 보다 그냥 N분의 1로 나눠갖는 것이다. 당연히 엄청난 예산이 수반되므로 재원조달이 문제될 것이고(1인당 100만원씩만 준다해도 50조원이다!), 제도의 취지 및 특성상 다른 복지예산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당장 아동수당이나 기초노령연금 등 현금성 지원부터 크게 줄어들 것이다. 아울러 기본소득을 전 국민에게 지급한다면 소득재분배보다는 가시적 경기부양과 인플레에 대한 우려가, 대상자를 선별할 경우 범위 결정 및 소득액 산정에 있어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속출할 우려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국민들의 최소한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점에서 기본소득은 충분히 매력적인 아젠다임에 틀림없다. 위성정당을 통한 우회상장이긴 했지만 당명에서부터 기본소득을 내세운 정당의 국회의원이 원내에 진입했고, 차기 대권주자로 꼽히는 일부 시도지사들도 벌써 기본소득을 거론하는 걸 보니 아마 다음 대선에선 기본소득이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와 관련 주목할만한 지점은, 이번 코로나19로 인해 전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면서 정부와 국민들 모두 의도치 않게 보편적 기본소득 지급을 위한 훈련을 하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말은 많았지만, 99% 이상의 국민이 수령했고 13조원 가량의 예산으로 다른 복지정책에 비해 직접 체감할 수 있는 효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가성비가 좋은 정책이었다고나 할까(여당 총선 압승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되기도 했고). 개인적으로는 연말쯤 한 번 더 재난지원금을 집행(물론 규모는 저번보다는 줄어들겠지만)하지 않을까 싶은데,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막연히 정부가 국민들에게 돈을 준다는 정도의 개념으로 접근할 게 아니라, 이로 인해 파생될 수 있는 여러가지 효과와 문제점들에 대해 진지하게 분석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아가 다소 왜곡된 듯 보이는 우리 사회의 복지 시스템도 바로잡아, 같은 예산이라도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지원이 늘어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