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수의 은퇴에 부쳐
한국시리즈 4차전 연장 10회초. 이미 3연승을 거두고 오늘도 11-9로 앞서 시리즈 우승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상황. 아웃카운트 두 개를 남겨놓고 감독이 덕아웃을 나선다.
연투를 거듭한 마무리투수는 다소 지치긴 했지만, 스스로 우승을 확정짓고픈 마음이 더 커 보였다. 대부분의 팬들도 이 팀이 우승을 하는 순간 그가 마운드를 지키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감독도 교체를 염두에 둔 모습은 아닌듯 했고.
그런데 일이 벌어졌다. 페어라인을 넘어선 감독이 잠깐 멈칫. 심판에게서 안된다는 제스처를 받은 듯 했다. 멋적은 웃음을 지으며 볼멘소리를 해보았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 뜻하지 않게 투수교체를 해야 됐지만 감독은 별로 항의도 하지 않고 웃으면서, 불펜 쪽을 향해 올라올 투수의 이름을 불렀다.
"영수, 영수!"
나는 TV 중계로 이 장면을 보았는데 소리가 안들려서 입모양만 보고 '덕주, 덕주!'인 줄 알았다. 함덕주는 아까 올라온 거 아닌가 의아했는데 불펜에서 뛰쳐 나오는 배영수의 얼굴을 보며 그럼 그렇지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당시 등판할 수 있는 투수는 세 명뿐. 다음날 선발이 될지도 모르는 린드블럼과 베테랑 불펜 투수 두 명이었는데, 우타 거포 두명을 상대하면서 좌완 권혁을 낼 수 없었을테니 순리대로 따지면 배영수가 올라오는 게 맞긴 했다.
그래도 두산 팬들로서는 이 상황이 다소 불안할 수밖에 없었을텐데, 올 한 해 두산 불펜에서 활약한 배영수는 '0구 끝내기 보크'로 상징되듯 미덥지 못한 투수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상대는 리그 최고의 강타자인 박병호와, 그에 못지 않은 외국인 거포 제리 샌즈. 이미 시리즈의 대세가 기울었다 해도 두 점 차의 열세는 이들의 장타로 충분히 만회할 수 있었고, 실제로 박병호는 2013년 준플레이오프와 2018년 플레이오프에서 모두들 끝났다고 생각하던 마지막 경기 9회에 홈런을 터뜨리며 시리즈를 혼돈으로 몰아넣었던 전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배영수는 불안함이라고는 1도 없어 보이는, 좋아서 어쩔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커리어 내내 주로 선발로 뛰었던 투수인만큼 이렇게 웃으며 등판하는 표정을 보기가 쉽지 않은데, 특히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 마지막 장면에 오르는 투수는 아무리 앞서가는 상황이라도 잔뜩 긴장한 모습일텐데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한화 팬으로서 배영수의 이런 표정을 본 적이 딱 한 번 있다. 안타깝게도 한화에서 뛸 때가 아니라 삼성에서 뛰던 2006년 한국시리즈 1차전이었다. 이날 선발로 나온 배영수는 4회 무사만루의 위기 상황에서 강타자 이도형을 5-2-3 병살타로 제압하고 이 비슷한 표정을 지었었다. 반대로 침울한 표정은 한화에서 몇 번 봤었는데, 그 중 기억에 남는건 2015년 어느 여름날, 수원에서 선발로 예정되었던 KT와의 경기가 우천취소되었을때 허탈한 표정으로 짐을 챙겨 나오던 모습이었다. 그 무렵 김성근 감독의 변칙적인 로테이션 탓에, 그렇게 선발등판 일정이 밀려버리면 다음 선발을 기약하기 어려웠던데다가 가끔은 불펜 알바를 뛰어야 하기도 했다. 그때 마주친 배영수를 보며 '영수 형 힘내세요'라고 외친 거 같은데, 그 와중에도 '네~'라고 답하며 가는 모습이 짠해 보였다.
한 장 뿐인 내 한화 이글스 저지에는 그때도 지금도 37번 배영수가 마킹되어 있는데 그날 사인이라도 받아둘걸...지나놓고 보니 못내 아쉬운 순간이다.
어쨌든 리그를 호령하던 왕년의 에이스는 팀을 두 번이나 옮긴 뒤 불펜 추격조가 되어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에 나서게 되었다. 박병호가 타석에 섰고 '혹시?'라는 키움 팬들의 기대와 '설마!'하는 두산 팬들의 걱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의 초구가 포수의 미트에 꽂혔다. 가운데로 꽉찬 스트라이크. 최근 몇년간 봤던 배영수의 투구 중에 가장 좋았다. 과장을 좀 보태면 오승환이 온 줄 알았다고 해도 될 정도. 김태형 감독도 이 공을 보며 우승하겠다 싶었다고 했지만, 나 역시 배영수가 이 공 하나를 던지기 위해 참 준비를 많이 했구나 싶었다. 그렇게 리그 최고의 타자는 15년전 리그 최고의 투수에게 삼진을 당했다.
이제 남은 아웃카운트는 한 개. 포스트시즌 내내 부진하긴 했지만 일발장타가 있는 샌즈는 무시할 수 없는 타자였다. 그런데 조금 어이없는 스윙에 빗맞은 공이 하필이면 투수 앞으로 가버렸다. 공을 잡은 배영수.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표정으로 껑충껑충 뛰면서 1루쪽으로 달려가다가 마지막 순간에 토스하는 것으로 시리즈를 마무리한다. 한국시리즈 우승이다.
개인적으로 끝내기 홈런이나 삼진으로 끝나는 시리즈도 괜찮지만, 투수 입장에선 투수땅볼로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 공을 잡고 잠시나마 우승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고, 플레이와 세리머니가 동시에 이뤄지는 동안 오직 투수만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삼진의 경우 포수와 심판에게 포커스가 맞춰진다).
어쨌든 이 경기를 통해 배영수는 개인 통산 최다 타이인 8번의 한국시리즈 우승, 한국시리즈는 물론 포스트시즌 최고령 세이브 기록을 세웠고 스스로 갖고 있던 한국시리즈 최다경기 등판 기록을 자신의 등번호와 같은 25로 갱신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년에 한 명 이상 나올 수 없고 스스로 커리어에도 없던 한국시리즈 헹가래 투수라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내게도 이런 일이!'를 외칠 정도로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지켜보는 팬들 입장에서도 영화와 같은 이야기였다. 인터넷 밈으로 돌던 '정권이 내'(예고은퇴를 선언한 박정권이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대타 역전 끝내기 만루홈런을 쳐 팀을 우승으로 이끈다는 이야기, 하지만 정작 박정권은 올해 플레이오프 마지막 경기에서 대타로 나와 삼진을 당하고 은퇴를 선언했다)의 현실 버전이라고나 할까.
우승 인터뷰에서 김태형 감독이 배영수에게 은퇴를 권유했었다는 사실을 밝혔지만 사실 투수 입장에서도 이보다 좋은 마무리를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본인에게 의지가 있다면 1~2년 정도 커리어를 연장할 수야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기대할만한 것들이 많지 않다. 특히 두산에 몸담고 있다면 내년에도 한국시리즈 우승을 노려볼 수 있겠지만, 그때도 헹가레투수가 될 거라고는 장담하기 어렵다. 이렇게 놓고 보면 최고의 순간에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떠날 수 있는 지금이 은퇴의 적기일 수 있을 것이다. 몇 가지 우연이 겹쳐 생긴 기적같은 상황이지만, 일부러 만들려고 해도 쉽지 않은 이야기라 더욱 드라마틱 했다. 이런걸 보면 정말로 야구의 신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한화 시절 배영수의 경기를 3번 직관했었다. 전적은 1승 2패. 그래도 2015년에 4번밖에 안되는 승리 중 1번과, 그의 커리어 통산 마지막 선발 등판 경기가 된 작년 6월 LG전을 직접 보았던건 잊지 못할 것이다. 한화 팬으로서는 아쉬운 순간이 많았지만(특히 그의 한국시리즈 통산 4승 2세이브 2홀드 중 정확히 절반인 2승 1세이브 1홀드가 한화 상대로 올린 거란 걸 알고 나선 더더욱 ㅋ) 리그의 에이스였다는 건, 그리고 어느 순간에도 최선을 다했다는 건 분명하니까. 그의 은퇴에 박수를 보내며 앞날에 영광이 있길 기원한다.